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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ritza (마리짜 강변의 추억) - Sylvie Vartan

happy prince 2015. 3. 19. 20:15

 

La Maritza (마리짜 강변의 추억) - Sylvie Vartan

 

  




La Maritza (마리짜 강변의 추억)

Sung By
Sylvie Vartan

 
La Maritza c'est ma rivière
Comme la Seine est la tienne
Mais il n'y a que mon père
Maintenant qui s'en souvienne
Quelquefois...
La Maritza, 그건 나의 강이야.
Seine강이 너의 것이 듯
정말 내 아버지 밖에는 없어.
지금도 생각나는
때때로...
De mes dix premières années
Il ne me reste plus rien
Pas la plus pauvre poupée
Plus rien qu'un petit refrain
D'autrefois...
La la la la ...
내 나이 막 10살이었을 때,
나에겐 전혀 아무 것도 없었어.
그 흔한 인형 하나도 없었고
낮은 소리로 흥얼대는 후렴구 밖에는
예전의...
La la la la...
Tous les oiseaux de ma rivière
Nous chantaient la liberté
Moi je ne comprenais guère
Mais mon père lui savait
Ecouter...
내 강가의 모든 새들
우리는 자유로움을 노래했었지.
나는 잘 몰랐었어.
하지만 내 아버지, 당신은 알고계셨지.
들으실줄을...
Quand l'horizon s'est fait trop noir
Tous les oiseaux sont partis
Sur les chemins de l'espoir
Et nous ont les a suivis,
A Paris...
지평선이 매우 어두워졌을 때,
새들은 모두 떠나버렸지.
희망의 길을 따라
그리고 우리도 그들을 따라갔어.
Paris로...
Parlé : De mes dix premières années
Il ne reste plus rien...rien
Chanté : Et pourtant les yeux fermés
Moi j'entends mon père chanter
Ce refrain...
La la la la ...
대사 : 내 나이 막 10살이었을 때,
전혀 아무 것도 없었어... 아무 것도
노래 : 그렇지만 두 눈을 감은 채
나는 내 아버지께서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네.
그 후렴구를...
La la la la...  





 

실비 바르탕 (Sylvie Vartan; 1944∼ )

감미로운 로망의 향기

십 몇년 전, 추억의 샹송 '춤추러 갈 땐 가장 예쁜 아가씨와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를 들었을 때의 감격이 나에겐 아직도 새로운데 지난 1979년 이화여대 강당에서 본 그녀는 어느새 로망의 향취마저 풍기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RCA와 전속계약을 맺고 프랭키 자르당과 듀엣으로 데뷔 레코드를 낸 것이 1961년이니까 올해로 가수생활 23년째가 되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천진난만하여 귀염성을 잃지 않고 있으니, 생명이 실로 길다는 생각마저 든다.

실비 바르탕의 나이 이미 40세를 넘어섰지만 그녀의 노래생활이 앞으로 20년을 더 계속되길 바라는 것이 올드 팬의 한결같은 심정 일것이다. 샹송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재능 있는 미모의 여가수로서 23년의 노래생활을 관철해 온 그녀는 프랑스에서 로큰롤을 부른 첫 여성이기도 했다. 1955년, 프랑스에선 로큰롤이 유행 못할 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빌 헤일리가 프랑스에 왔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폴 앙카의 '다이아나'는 대인기였다. 당시 프랑스에선 강렬한 소리가 나는 전자 기타에 맞춰 발을 구르는 새로운 스타일의 많은 가수들을 '예예'가수라고 불렀다.

예예 가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어의 예스에서 나온 말로 프랑스에 로큰롤이 상륙했을 때 미국식을 따라 예예 가수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조니 알리데이, 실비 바르탕, 리샤르 앙토니, 클로드 프랑스와 등이 바로 예예 가수로 젊은이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무렵 실비 바르탕의 첫 히트곡 '춤추러 갈 땐 가장 예쁜 아가씨와'는 조니 알리데이와 동시에 그녀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올랭피아 극장에서 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1962년, 그녀는 같은 무대에서 조니 알리데이와 만났다. 두 사람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함께 순회 공연길에 나섰다가 이듬해 8월 15일 스위스의 몽트르에서 약혼을 발표하여 또 한번 화제가  되었다.

1959년과 '62년 사이, 조니 알리데이는 프랑스에서 젊은이들의 최고의 우상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청중은 환호성을 쳤고 의자를 박살내는가 하면 비명을 지르고 저고리나 바지를 찢을 정도였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아랑곳없다는 듯 조니 알리데이 팬클럽을 조직하여 그곳에서 그의 친구들을 서로 만났다.

1943년 6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난 조니 알리데이의 성장에 관해선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어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모친과 사별한 그는 지방을 순회하는 연예인 부부에게 구제되어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무대에 섰다는 것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얘기라고 생각된다. 그는 1959년 조니 알리데이로서 데뷔한 다음 날에 알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서서히 변해 갔다. 1961년부터 소란한 로큰롤 음악을 부르지 않게 되었고 그 후 한동안 유행했던 트위스트에 빠져드는가 하면 때로는 덜 빠르게 노래하고 느릿한 샹송을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출발이기도 했다.

실비 바르탕이 약혼자 조니 알리데이와 결혼한 것은 1965년 4월 12일, 동남아 ·남미 ·미국 등지를 순회 공연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그때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우상인 한 쌍의 빛나는 청춘의 한 시기였다. 프랑스가 온통 그들의 결혼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나란히 정답게 무대에 나타나는 이들 신혼부부의 모습은 어느 누구의 눈에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비쳤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순조로왔다. 1966년에 실비는 파리의 어느 깨끗한 병원에서 조니 알리데이와의 사랑의 결정인 아들 다비드를 낳았다.

 

그러나 실비 바르탕의 생애 가운데 가장 불행한 사건이 1968년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녀가 남미 연주여행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즐거운 표정으로 귀국한 4월 11일 10시 40분경이었다. 고속도로상에서 실비의 자가용 OSI가 맞은편에서 질주해 온 푸조 404와 충돌한 것이다. 바람처럼 달려온 서슬에 실비의 몸은 차에서 솟아오르더니 곤두박질치며 땅 위에 태질치듯 나가떨어졌다. 마치 폭풍에 휘말려 떨어진 한 송이 꽃잎처럼 그녀는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었다. 즉시 앰블런스가 달려와 실비는 의식 불명인채 병원으로 옮겨졌다.

실비는 기적적으로 생명은 구했으나 자동차의 프런트 글라스의 파열로 얼굴에 크게 상처를 입어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함께 동승했던 실비의 가장 가까운 여자친구 멜세데 칼멜은 즉사했다. 이제 가장 염려되는 것은 과연 그녀가 다시 가수로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며칠 후 의식을 되찾은 실비는 눈을 감은 채 격심한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친구를 잃었다는 마음의 상처에서 옵니다. " 라고‥‥‥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음악계에선 실비의 재기 불능설이 나돌았지만 그 얼마 후 그녀는 또 하나의 실비다운 기적을 남겼다. 그 해 12월 실비는 마침내 부활했던 것이다. 재기공연을 위해 올랭피아 극장의 무대에 선 실비의 생기에 넘치는 아름다움과 명랑함에 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몇 달 전의 상처자국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의 재기곡이 '마리차 강변의 추억 La Maritza'이었다.

그 뒤로 실비는 1970년 2월 21일 두번째의 교통사고로 크게 부상당했으나 이번에도 또 재기하여 놀라운 의지력을 과시했다. 생사의 고비를 두 번씩이나 넘기고도 생기있는 아름다움과 노래의 매력을 잃지 않고 여전히 톱스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녀는 실로 운 좋은 가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르 포왕'지는 지난 '82년 봄, 파리에서 있었던 실비의 공연을 이렇게 쓰고 있었다.

실비의 공연은 스포츠 궁전을 꽉 메운 청중들 속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예전에 뱃심만으로 노래하던 것과는 달리 가창면에서 크게 변화한 그녀는 화려한 레오타드풍 의상으로 각선미를 자랑하면서, 헤어진 전남편으로 최근 재혼한 조니 알러데이에 대항하듯 성숙한 여인의 매력을 짙게 뿌려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 사람외 여성으로서, 가수로서 더욱더 원숙미와 매력을 더해가는 실비야말로 나이란 그녀의 생애에 빛을 더하면 더했지 감퇴 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최근 실비는 파리 10구 프티트 에퀴리가에서 무용학교를 건립했다. 그녀의 무용학교는 파리에 있는 무용 학교와는 달리 이색적이다. 남녀노소와 초보자는 물론 직업댄서까지 학생으로 받아들여지고 고전무용과 현대무용, 탭 댄스와 재즈댄스 등 갖가지 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니 알리데이와 이혼, 18세 된 아들 다비드와 함께 살고 있는 실비는 앞으로 노래와 함께 자신의 무용학교를 세계 제1의 학교로 키우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Sylvie Vartan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8살때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한 실비 바르탕은 60년대 영화 '우상을 찾아라'의 주제곡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라 플뤼 벨 푸르 알레 단세)'로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고 스타가 됐는다. 이후 7,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 'Love is Blue'와 'La Maritza' 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팬을 가진 '파격과 낭만의 여가수'다. 그녀는 1965년 프랑스의 전설적인 록커 자니 홀리데이 (Johnny Hallyday)와 결혼을 하고, 함께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었는다. 그 이듬해인 1966년 8월 14일 그들은 사랑의 결실로 아들 David Michael Benjamin Smet 를 출산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1980년 11월 4일 이혼장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녀는 현재 아메리카 미디어 사장인 미국인 Tony Scotti와 결혼을 해서 살고 있다, 영화배우 마이클 바턴 (Michael Vartan)의 숙모이기도 하다. 한때,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물로서 에펠탑과 개선문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꼽을 정도로 그녀가 프랑스에 끼치는 영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2004년에 회갑을 맞이한 실비 바르탕은 기념으로 자서전 출간과 함께 신보 'Sylvie'도 발표하고 유럽 프로모션 활동 등을 하기도 했다.